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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혼고쿠초에 위치한 일본은행 전경.

 

제22대 총선(2024년 4월 10일)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을 선거구에 출마한 김은혜 국민의힘 후보를 만난 적이 있다. 이 사실은 김 후보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총재와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분당의 재개발을 활성화하기 위해 이 총재에게 금리 인하를 요구했다는 글을 올리면서 드러났다. 그가 김 후보와 면담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 후보는 이를 자신의 선거운동에 활용했다. 이런 운동이 주효했는지 모르겠으나 김 후보는 총선에서 당선했다.

통화신용 정책을 통해 물가 안정을 꾀함으로써 나라 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할 책임을 진 한은의 총재가 아무리 대통령의 측근이라고는 하지만 한 지역구의 국회의원 출마 후보를 만나 금리 인하 민원을 들은 것은 충격적이다. 이런 얘기를 들은 한 경제학자는 주저 없이 '한은 총재 탄핵 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큼 중앙은행인 한은의 통화정책은 국민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일반 정부기관과 달리 한은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특별법을 제정해 보장하는 것도, 행정부나 권력자의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국민 경제의 안정을 꾀해달라는 바램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역할을 '물가의 파수꾼'이라고 부르는 것도 중앙은행의 가장 큰 임무가 민생 안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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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일본은행?>(가갸날, 니시노 도모히코 지음, 한승동·이상 옮김, 이명준 감수, 2024년 2월)은, 1990년대 초 부동산 거품의 붕괴부터 시작한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을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해부한 책이다.

 

저자는 <지지통신>과 민방 <TBS>에서 경제부 기자를 지내며 경제 문제를 장기간 다뤄온 재정·금융 분야의 전문 저널리스트다. <헤이세이 금융사>, <도큐먼트 통화 실정>, <검증 경제 미주> <검증 경제 암운>과 같은 일본의 재정·금융 정책을 파헤치는 굵직한 책을 펴낸 것에서 그의 내공과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1996년에 시작한 일본은행법 개정 논의를 기점으로, 아베 신조 총리의 사퇴와 스가 요시히데 정권 발족에 이르기까지 일본은행의 '시련과 고뇌의 25년'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간에 제로 금리부터 양적 완화, 리먼 쇼크(2008년 금융위기), 다른 차원의 완화, 코로나 쇼크가 포함돼 있다.

일본은행은 1996년에 그동안 비원이었던 '독립성'을 담은 일본은행법 개정을 이뤄냈다. 무려 55년 만의 쾌거다. 일본은행은 태평양전쟁 전에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화폐를 남발하는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마치 독일이 1차 대전과 2차대전을 겪으면서 중앙은행의 화폐 남발로 초인플레이션을 겪은 것처럼 말이다. 독일 중앙은행인 도이체방크는 전후 이에 대한 반성으로 철저한 독립성을 가진 기관으로 태어났다. 일본은행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뒤인 1996년에야 비로소 독립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일본은행은 독립성을 담은 일본은행법을 손에 넣자마자 시련을 맞는다. 일본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총리실과 대장성으로부터 경기 부양을 위해 협조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정부 쪽은 일본은행의 독립성이란 '정책의 독립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의 독립성'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일본은행이 정부의 경기 부양 정책에 협조할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한다. 이런 정부 쪽 요구에 독립성을 강조하는 총재가 재직할 때는 어느 정도 저항했지만 정부의 눈치를 보는 총재가 들어서면 정부의 하부기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종했다.

이 책은 1996년부터 2023년까지 일본은행 총재를 지낸 5명의 총재 별로 장을 나눠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갈등 및 협조 관계를 다루고 있다. 큰 흐름으로 보면, 초기에 총재를 한 사람일수록 독립성을 강조하며 버텼으나 후기로 갈수록 정부 정책에 적극 협조했다. 저자는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수 명의 총리와 재무상, 일본은행 총재와 수많은 일본은행 실무자들을 인터뷰하고 공개·비공개 내부 자료와 개인 일기까지 섭렵하며 사건을 재구성했다. 꼼꼼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일본의 저널리스트의 진가가 그대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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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일본은행 총재 중 정부 정책에 가장 협조적인 끝판왕은 아베 총리 시절에 '아베 노믹스'를 적극 지원한 쿠로다 하루히코다. 아베 총리가 전임 총재를 내치고 그를 꼭 찍어서 임명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일본은행의 독립성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정부 정책에 대한 협조에 방점을 둔 통화정책을 주도했다. 특히 아베노믹스 지원을 위해 2% 물가 상승을 목표로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려대듯 무제한 돈을 찍어내는 정책에 적극 호응했다. 그 결과, 일본은행의 총자산은 7년여의 제2기 아베 총리 시절에 5배 이상 증가했다. 일본은행이 돈을 마구 풀어 장기국채뿐 아니라 상장회사 주식까지 매입했기 때문이다. 2023년 6월 시점에 일본의 국가부채 비율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24%로 세계 최고 수준인데, 아베와 쿠로다 총재의 책임이 크다. 그렇다고 아베노믹스가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다. 수출과 주가 상승 등 단기적인 경기 부양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실질 임금 저하와 개인 소비 감소로 경제 체질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자는 "소선구제의 도입과 두 차례의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승리가 전부'가 되었다"라면서 이런 힘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가 '현재의 일본은행의 모습이자, 비정상적인 금융완화'라고 지적했다. 그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일본은행이 정권 또는 정치인의 이해관계에 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권을 위한 통화정책은 결과적으로 국민의 부담과 생활의 악화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경고인 것이다.

한국 경제도 지금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에 못지않은 어려움에 처할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기업, 가계 할 것 없이 어려운 속에서 특히 건설 분야의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가계대출로 인한 경제 위기론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정권이 한은을 마치 산하 기관처럼 부리며 통화정책을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움직임도 눈에 띈다. 그렇다고 한은과 한은 총재가 물가 안정과 국민 생활 보호를 위해 저항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윤석열 정권 들어서는 검사 출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한은이 펴야 할 정책까지 좌지우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은 총재의 존재감은 옅다.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일본 경제 위기의 순간에 일본 중앙은행은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했는지, 과오는 무엇이었는지를 다룬 이 책은, 이런 점에서 한국 경제와 한은의 역할에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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