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Sputnik International)/ 김정호 번역
등록일 : 2024.05.03
오데사-1.png.jpg
2014년 5월 2일 오데사에 있는 노동조합 건물에서 대규모 소요가 발생해 약 50명의 반정부 활동가가 사망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건물 안에서 산채로 불태워졌다. 

 

목요일은 2014년 5월 2일 오데사 노동조합 건물 학살 사건이 발생한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사건에서 48명의 反 마이단 활동가들이 네오나치 깡패들에 의해 산 채로 불태워졌다. 키예프가 돈바스에서 '반테러 작전'을 시작한 직후 발생한 이번 폭력 사태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피로 물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당시 신정권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2014년 봄의 따뜻한 날씨는 우크라이나 남동부 전역에 혁명적 열정의 바람을 동반했다. 하르코프 전역의 활동가들, 돈바스, 자포로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헤르손, 니콜라예프, 오데사 등이 키예프에서 2월에 발생한 유로마이단 쿠데타에 반대해 봉기했다. 

 

우크라이나 수도에서 미국과 EU가 후원하는 쿠테타가 일어나 민주적으로 선출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 정부가 축출되고, 그 자리가 서방과의 긴밀한 관계를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급진적인 친미 및 극단적인 민족주의 세력으로 교체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 반란은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많은 주민들로부터 분노를 샀다. 수세기에 걸쳐 러시아와 공통의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가족적, 경제적 및 기타 유대 관계를 소중히 여겨온 남동부 지역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의 유라시아경제연합* 가입을 선호했으며 신정부의 친EU, 친나토 노선에는 반대를 표명했다. 

 

유라시아 경제연합은 독립국가연합에 있던 러시아카자흐스탄벨라루스아르메니아키르기스스탄 5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를 통합하는 국가연합이다.

 

오데사-2.png.jpg
소련군이 오데사를 나치 점령에서 해방한 지 80년이 지났다.  한 오데사 주민이  당시 도시에 들어온 소련군에게 적기를  건네주고 있다. 

 

키예프와 하르코프에 이어 우크라이나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오데사는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왕관에 박힌 보석'이었으며,  20세기의 거의 모든 극적인 사건을 목격했다. 오데사의 주민들은 1905년 러시아 혁명과 1917~1922년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이 도시는 위대한 애국 전쟁이 시작되는 몇 달 동안 나치에 대한 저항의 핵심 중심지가 되었으며, 1941년 10월 중순까지 73일 동안이나 수적으로 우세한 나치 군대에 맞서 영웅적으로 버텼고, 2년 반 동안의 혹독한 점령 끝에 1944년 4월에 해방되었다. 

 

놀라운 19세기 신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곳곳에 있고 러시아, 유대인, 우크라이나 문화가 독특하게 혼합된 주민들이 거주하는 오데사는 전통적으로나 본질적으로 문화적 자기 정체성 면에서 스스로를 러시아인으로 여기고, 대다수 주민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오데산 러시아어' - 이디시어와 우크라이나어에서 외래어를 사용한 혼합 언어이다). 경제적으로도, 러시아와의 경제 공간으로 수세기 동안의 편입은 오데사가 소련의 가장 큰 항구로 기능하고 석유, 가스, 화학 및 곡물 저장 시설을 포함한 풍부한 항구 인프라와, 광범위한 파이프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시베리아와 우랄까지 뻗쳐 있는 에너지 및 자원 연결을 포함하여 이곳 주민들이 모스크바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열망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문 주석]

 

2013년 11월 유로마이단 시위가 시작되고, 친마이단 활동가들이 야누코비치 정부가 EU와 유럽연합 협정을 거부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키예프 중심부에 첫 번째 캠프를 막 설립했을 때, 오데사는 마이단에 반대하는 세력이 조직된 남동부 우크라이나의 최초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2013년 11월부터 2014년 1월까지 유로마이단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경쟁적으로 집회를 조직했다. 전자는 오데사의 포템킨 계단 꼭대기에 있는 리슐리외 공작 기념비 앞에 모였으며, 후자는 쿨리코보 야영장(옛 10월 혁명 광장)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노동조합 건물을 포함한 도시의 역사적 중심에 있는 정원 광장이다.

 

반대 운동자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유로마이단 지지자들이 수도에 있는 그들의 동료들과 합류하여 야누코비치의 축출과 유럽과의 긴밀한 관계를 요구했던데 반해, 반대자들은 당국에게 질서 회복을 촉구하고, 러시아와의 관계 보존을 요구했다. 친마이단 진영의 공격적 중추를 구성할 극우적인 민족주의 정서의 부상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다.

 

오데사의 상황은 우크라이나 서부를 휩쓸고 있던 정부 건물 압수 물결 속에서, 친 마이단 활동가들이 경찰과 충돌하고 행정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수도 키예프에서 일어난 사건과 함께 악화되었다. '오토마이단(AutoMaidan)'과 '오데사 유로마이단 자위대(Odessa Euromaidan Self-Defense)' 라 불리는 친마이단 지지자들 역시 이들 마이단에 반대하는 오데사 '인민분대'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2014년 2월 쿠데타 지지 세력이 승리한 후 反 마이단 활동가들은  신정부의 급진적인 반러시아 노선에 경악해 하면서, 러시아어 보호를 요구하고 연방화와 권력 분산을 요구하며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국가 정책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의 이익에 대한 특별 보호를 요구하였으며,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 회복, 극우 민족주의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다. [원문 주석]

 

오데사의 상황은 2014년 3월 크리미아 주민들이 국민투표에서 우크라이나에서 탈퇴하고 러시아에 다시 합류키로 결정한 후 더욱 악화되었다. 4월에는 도네츠크, 루간스크, 하르코프에서 마이단 활동가들이 연방화의 동참을 요구하며 행정 건물을 점거하는 일련의 시위가 잇따랐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보안 기관과 군대에 의해 징벌적인 군사 및 정보 작전에 직면했다. 하르코프에서 수백 명의 활동가들이 체포, 구타, 실종, 투옥되거나 강제로 집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다. 돈바스 주민들은 키예프의 이러한 잔인한 ‘반테러’ 작전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 인민 민병대를 결성하고 인민 공화국을 선포했다. 

 

쿠데타에 힘입어 집권한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지도자들은 동부와 동남부의 신생 친 자치, 친 독립, 친 러시아 정서가 조직적이고 통일된 정치 운동으로 성장하여 확산되고, 통일된 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 해체를 극도로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원문 주석]

 

오데사-3.png.jpg
2014년 루간스크 지역 정착촌에 대한 우크라이나군의 공습으로 발생한 화재로부터 지역 주민들이 도망치고 있다. 

 

ㅡ 5월 2일 대학살

 

스푸트니크는 지난 10년 동안 2014년 5월 2일 사건을 광범위하게 기록하고, 목격자와 언론인들과 대화했으며, 우크라이나 당국이 그날 발생한 극심한 폭력의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희생자를 추적하고 체포하는 노력에 대해 주시했다.

 

5월 2일 오후, FC 코르노모레츠 오데사(Chornomorets Odessa)와 FC 메탈리스트 하리코프 풋볼 울트라스(FC Metalist Kharkov football ultras)의 힘을 빌려 약 2,000명의 친 마이단 활동가들이 승리의 날 축제를 앞두고 쿨리코보 광장에 있는  마이단 야영지를 향해 행진했다. 막대기, 방망이, 임시방패, 돌, 공기총, 그리고 소량의 총기로 무장한 남자들 사이에서 주먹싸움과 난투극이 빠르게 벌어졌다. 경찰은 폭력을 막기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쿨리코보 광장의 방어자들로 하여금 보안군이 민족주의자들, 극우주의자들과 공모하고 있다는 생각을 촉발시켰다.

 

폭력사태는 곧 치명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친 마이단 깡패들과 축구 광신자들의 수는   마이단 시위대보다도 10대 1정도로 우세했다. 수십 명의 '인민분대' 구성원과 민간인들이 노동조합 건물로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다. 휘발유 폭탄에 의해 불이 타올랐다. 사방이 갇혀 탈출할 기회가 없었던 최소 42명의 반 마이단 활동가들이 사망하였다. 연기에 질식하고, 산 채로 불에 타거나, 건물 내부에서 살해되었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사람은 지상에서 극우자들에 의해 마무리 지어졌다. 또 다른 6명이 총격으로 숨졌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오데사-4.png.jpg
우크라이나 오데사 노동조합 건물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화재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럽인권재판소와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오데사 노동조합 건물 학살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당국, 법집행기관, 법원이 이 사건을 기소하는데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점을 통해 입증된다. 

 

ㅡ 우크라이나를 공포에 떨게 하다

 

당시 사건의 목격자이자 오데사 시의회의 의원이며, 사건을 조사하는 데만 10년 동안 헌신한 바실리 폴리쉬추크(Polishchuk)는, 오데사 대학살은 그 도시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역의 마이단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계획된 범죄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협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단지 해산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오데사 주민들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라고 폴리쉬추크는 스푸트니크에 말했다.

 

소련 시절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겪은 베테랑이자 우크라이나 공산당 출신의 전 의원인 폴리쉬추크는 2014년 5월 2일 사건 이후 노동조합 건물 화재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아들과 조력자를 대상으로 한 박해와 물리적 폭력에 직면하여 고향인 오데사를 떠나야 했다.

 

오데사-5.png.jpg
2014년 5월 2일 오데사에서 친 마이단과 반 마이단 활동가들 사이에 발생한 충돌로 거의 50명이 사망한 후,  소방관들이 오데사 노동조합 건물의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폴리쉬추크는 그날의 사건으로 인해 48명이 아닌 적어도 51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오데사의 반 마이단 활동가들은 "99.9%" 현지인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 도시에서의 시위가 러시아 국민이나 심지어는 러시아 정보기관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우크라이나 당국과 서방 언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폭로했다.

 

“그들 중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교인, 무신론자, 여성도 많았습니다. 대략적으로  모든 생물체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그 전날은 5월 1일[국제 노동자의 날-편집자 주]이었고, 이날은 언제나 우리에겐 휴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명절 집회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로부터의 탈퇴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단지 평화적인 요구만 있었습니다.”

 

ㅡ 사전에 잘 준비된 작전 

 

이  의원은 친 마이단 세력 중 지역 주민은 10%에 불과하였으며, 대부분은 수도 키예프에서 쿠데타 이후 신질서를 시행하기 위해 반항적 도시로 유입된 다른 도시와 지역의 주민들일 것이라고 추산했다.

 

폴리쉬추크는 쿨리코보 광장에서 반마이단 세력을 해산하기 위한 폭력 작전이 한 달 반 전에 미리 준비되었다고 확신했다. 새로 집권한 우크라이나 당국은 남부와 남동부, 특히 새 정부에 반대하는 심각한 항의 운동이 싹트고 있던 오데사와 니콜라예프에서 반 마이단 감정을 길들이기 위해 무장하고 훈련된 깡패들을 남쪽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 '손님'은 휴가객으로 가장하여 자토카(Zatoka) 지역 [오데사 교외, ed.]의 레크리에이션 센터, 오데사 파블로프의 하우스 호텔 및 도피노프카 [리조트 교외, ed.]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오데사에서 아파트를 임대하고 고르키, 레르몬토프스키 및 기타 요양소에 머물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캠프'에는 키예프 마이단을 거친 사람이 최소 1,500명 정도 있었습니다.”라고 폴리쉬추크는 추정했다.

 

이 조사관은 이들 군대가 잘 조직되어 있었다고 강조했다. 오데사 주변에 최대 5개의 검문소가 설치되어 유로마이단 활동가들이 스스로 도시를 드나드는 차량을 검사하고, 경찰과 심지어 정부 관리들이 그것을 해체하라는 명령도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오데사-6.png.jpg
친마이단 활동가들과 극우주의자들이  노동조합 건물 내부 수십 명의 반마이단 활동가들에게 불을 지른 후  이 건물이 불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체르노모레츠-메탈리스트 (Chernomorets-Metalist) 축구 경기는 친 마이단 훌리건들에게는 완벽한 기회가 되었다. 수백 명의 극우주의자들이 도시에 도착하는 것과 함께 경기가 이루어졌다고 폴리쉬추크가 말했다.

 

“결국 그들은 축구 경기를 핑계로 도시 전역에서 '우크라이나 통일을 위한 행진'을 조직했고, 다른 형태로 소위 쿨리코보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을 파괴했습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주민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쿨리코보 광장은 그들 옆구리의 가시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데사-7.png.jpg
오데사 노동조합 건물의 검게 그을린 입구 앞에서 한 여성이 울고 있다. (2014년 5월)

 

폴리쉬추크는 우크라이나 보안국이 반마이단 소요를 진압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추측했다. 오데사 대학살의 여파로 하르코프, 니콜라예프, 오데사에서 반마이단 세력을 해체하기 위한 작전이 성공적이었고 "반대자들은 패배했다"라고 자랑한 것을 그 실례로 들었다.

 

“이러한 사건이 사전에 계획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는 4월 29일 [당시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장관 안드리] 파루비(Parubiy)가 오데사에 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앞서 말했듯이 도시 주변에는 5개의 검문소가 있었습니다. 그가 방문한 7km 시장 근처에도 마이단 시위대에게 방탄조끼를 가져다주는 초소가 있었습니다. 또 무엇을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안에는 레벨 5 방탄복이 20개 정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오데사 지역 행정부에서 회의를 가졌습니다. 나는 그가 축구 경기를 핑계로 5월 2일에 이미 계획된 작전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준비 상황을 점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합니다…그는 5월 2일에 오데사에 있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 생각엔 그가 그랬던 것 같지는 않고, 그런데 그날 범행을 저지른 사람 중에 그와 연락을 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폴리쉬추크는 또 쿨리코보 광장 충돌이 발생하기 몇 시간 전인 5월 2일, 우크라이나 부검찰총장인 미콜라 반추크(Mykola Banchuk)가 오데사에 도착하여 정오 12시 경 푸슈킨스카야 거리에 있는 지역 검찰청 직원과 보안군 성원을  소집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분리주의 반대 투쟁'을 주제로 한 회의에서 휴대폰을 꺼달라고 지시했다. 무슨 이유때문에? 공공질서를 수호해야 할 경찰이 '특수임무' 수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했습니다.”

 

오데사-8.png.jpg
 런던의 오데사 희생자를 기념하는 집회에서 (2022.05.02.)

 

ㅡ '공포가 계속되다'

 

쿨리코보 광장에 있었고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이 전 의원(폴리쉬추크)은 세력 균형이 무너진 것을 깨달고, 반 마이어 활동가들을 그 지역에서 떠나도록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회상했다.

 

“그 비율은 마이단 지지자 1,500~2,000명 대 반 마이단 활동가 150~200명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끝날지는 즉시 분명해졌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여기서 나가라,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떠나지 않을 거예요'라고 그들은 답했습니다. 유로마이단 부대는 풍부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공포가 뒤따랐습니다.”라고 폴리쉬추크는 회상했다.

 

“오후 7시쯤 노동조합 건물에 불이 붙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소방서에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계속 불통이었습니다. 나는 한 남자가 내 눈앞에서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창문 밖으로 던져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내 5미터 앞에서 시체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오데사 지방의회의 슬라바 마르킨 전 의원이었습니다.

 

그전에 한 여자의 '도와주세요, 여러분, 도와주세요!'라는 외침이 들렸습니다. 거리의 그들은  '입 닥쳐라!'라고 소리쳤습니다. 갑자기 그 여자는 조용해졌고, 한 남자가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고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을 외치며 창가에 나타났습니다. 거리의 그들은 '영웅에게 영광을!'을 이라고 외치며, 박수를 쳤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들이 이리나 야코벤코를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성은 당시 텔레비전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는데, 그 여성은 노동조합 건물 탁자 위에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철사로 목이 졸렸습니다.”

 

폴리쉬추크는 최소 51명이 사망하고 약 230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100%" 확신했다. 그는 “정직한 조사를 통해서만 정확한 수치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이 전 의원은 우크라이나 당국이 그러한 조사에는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그런 조사를 하는 것은 단지 “자신들을 유죄로 만드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는 파루비(Parubiy)와 SBU* 책임자가 된 [발렌틴] 날리바이첸코(Nalyvaichenko)가 이 일에 관여했다고 확신합니다. [전 내무장관 아르센] 아바코프도 연루되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과두 정치인 이호르] 콜로모이스키가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지역 행정 책임자인 [볼로디미르] 네미로프스키가 콜로모이스키의 염원을 수행했습니다.”라고 폴리쉬추크가 말했다.

 

*SBUㅡ우크라이나 국내의 치안 담당 및 방첩기관이자 정보기관

 

폴리쉬추크의 정직한 조사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베르호브나 라다( Verkhovna Rada) 의회와 오데사 지역 의회에서 만들어진 두 (조사) 위원회 모두 이빨이 빠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사관의 증인 요청은 잠재적 용의자들에 의해 단순히 무시되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SBU, 경찰, 검찰청이 수행한 공식 조사는 친 마이단 세력의 불법 행위에 대한 증거를 지우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으며, 그 이상은 아니라고 폴리쉬추크는 믿고 있다.

 

오데사-9.png.jpg
노동조합 건물 비극의 소용돌이 속 오데사 

 

폴리시추크는 학살 사건 직후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친마이단 세력은 2014년 5월 20일과 9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아들 목숨을 노리는 시도를 했다. 그의 조수는 2015년 1월 경찰 건물 바로 앞에서 표적이 됐다. 두 번째 공격으로 인해 그의 아들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세 명의 공격자가 아들의 머리를 가격한 후 의사들은 거의 한 달 동안 신경외과 수술을 시행했다.

 

이것이 2014년 2월 유로마이단 쿠데타를 수행한 세력들이 운영하는 방식이라고 폴리쉬추크는 말하면서, 야당을 향한 그들의 전략은 매우 간단하다고 강조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매수하고,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상대와 표적으로 삼은 가족을 살해하는 것이다.

 

지금 오데사 주민들이 10년 전 쿨리코보 광장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폴리쉬추크는 아마도 엇갈린 감정일 것이라고 개탄했다. “정보와 심리적 처리가 자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데사를 포함한 우크라이나의 전반적 상황은 철조망과 화장터가 없는 강제수용소라고 부릅니다.”

 

2024.05.02

 

(원문보기)

https://sputnikglobe.com/20240502/odessa-massacre-ten-years-on-how-radicals-drowned-city-in-blood-to-subdue-ukraine-1118193803.html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이스라엘, 미 패트리엇 퇴짜..."무수한 목표 요격 실패" 

[류경완의 국제평화뉴스 24.05.07(647)]

2024.05.07

우크라이나, 러시아어 지위 및 '나치즘 금지' 조건으로 2022년 평화 협정 거부

2024.05.06

'신사협정' 파기, 마닐라는 현명치 못하다

2024.05.06

전략적 전환을 맞이한 중국 전기차 산업

2024.05.04

오데사 학살 10주년: 극우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기 위해 도시를 피로 물들인 방식

2024.05.03

스캇 리터: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막대한 군사 지원은 러시아의 전략적 우세를 막지 못할 것

2024.05.02

117대의 세계 신차! 베이징 모터쇼에서 본 자동차 발전의 새로운 추세

2024.05.02

우크라이나, 심각한 병력 부족으로 나토의 무기 공급이 무색

2024.04.30

포르투갈 대통령 "브라질 식민시대 범죄 사과, 배상할 것" 

[류경완의 국제평화뉴스 24.04.29(646)]

2024.04.30

왜 북경모터쇼에서는 ‘과잉생산’을 볼 수 없나?

2024.04.29